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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지쳐버린 나라, 그리고 노무현

SWEV 2014. 12. 5. 04:12

주변에서 사람들이 컴퓨터를 산다며 종종 나에게 이것 저것 묻곤 한다. 어지간하면 요즘 컴퓨터는 다 빠르고 좋아서 뭘 사도 그게 그거라며 특별하게 사고 치지 않을 부품들만 골라 가르쳐주지만 이따금 드물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싸고 좋은 물건'으로 견적을 뽑아달란 사람들이 그렇다.

 

△ 잘도 그러겠다.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 신념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을 안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양심은 가지고 투표를 하길 바랐다. 무언가 나아지길 기대한다면, 내 주머니가 조금 얇아지는 것 정도는 다들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민주주의라 믿었다.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는 만큼,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들 수는 없기에 조금씩들 양보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성립할 수 없을테니까.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내가 기대하던 것과 많이 달랐다. 사람들은 내 주머니에 들어있는 그 어떤 것도 내놓지 않은 상태로 조금 더 나은 세상이 오기를 원했다. 집값이 떨어질까 두려워 하며 경제를 살려줄 것 같은 대통령 후보를 사람들은 뽑아주었다. 정동영의 병신같은 자폭만으로 일어난 결과가 아니다. 집 값이 비싸다는 뉴스를 보며 우리나라의 잘못된 구조를 욕하지만 자신의 집값이 떨어지는 일은 피하고들 싶어한다. 이 모순 속에서 뽑힌 대통령에게 과연 무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랑 없이 시작한 연인 만큼이나 결과가 뻔할 일이었다.

 

나는 이명박이 집권할 때 최소한 '난세의 간웅'은 되어주길 바랐다. 간사하고 권력욕에 찌든 쓰레기같은 사람이라도 좋으니 일 만큼은 잘 해주길 바랐다. 조조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간'자가 붙어도 좋았다. '웅'이기만 하다면, 어떻게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달래줄 수 있다면 그걸로 5년 동안 제 몫을 다 한 것으로 봐도 괜찮을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얼굴 예쁜 연예인에게 성격까지 아름답길 기대하지 않듯이, 대통령에게도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포기했다. 경제는 꼭 살려 달라던 국밥집 아줌마의 바람을 나도 가졌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타난 결과는 참담했다. 굳이 글로 옮겨 적지 않아도 누구나 안다.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 라는 유행어가 다시 튀어나오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 가슴이 먹먹해졌다. 물론 박근혜 후보가 불쌍해서 먹먹했던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한 번의 대선, 달라진 건 없었다. 증세 없는 복지라는 몇 마디에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여 넘겼다. 속은게 아니다. 알면서도 속여 넘긴거다. 세상에 공짜가 없음을 투표권을 가진 모든 국민들은 당연히 알고 거기에 맞추어 한 표를 던지리라 믿었건만, 국민들 스스로 짜고치는 고스톱 판에 끼어 앉았다. 광이라도 팔게 해줄 거라 믿었던 걸까? 그 와중에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에 '불쌍하다'가 껴 있는게 너무 무서웠다. 남대문 시장 거지나 서울역 노숙자도 불쌍하니 대통령을 시켜줘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의아할 정도다.

 

싸고 좋은 물건이란 것이 있을리가 없다. 제 값을 하는 물건과 그렇지 못한 물건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종종 저 간단한 사실을 잊는다. 나의 노력, 나의 돈, 나의 시간이 들어가는 것은 싫지만 그래도 좋길 바라는 마음.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상에 공짜가 없으니 저런 일이 있을리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자꾸 기대를 걸고 마음을 쓴다.

 

한쪽에서는 공짜 바라는 것이 한국인의 종특이라며 반성하듯 지껄이지만 그건 분명히 아니다. 당장 과거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전쟁이 나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줄 알았고, 정치적 신념을 위해 남산 밑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4.19나 5.18 같은 혁명들은 우리네 아버지 세대들이 스스로 피를 흘리길 주저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증거다.IMF 시절의 금모으기도 마찬가지다. 목숨과 피가 아니더라도 스스로의 지갑은 털 용기들을 사람들은 다들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과거의 우리나라는 국민들은 그러했다.

 

15년 새에 그 뜨거운 국민들은 도대체 어디로들 사라진 걸까. 어째서 '영웅'을 기대하며 한 나라의 지도자를 뽑고, 어째서 더 이상은 희생하고 참아가며 미래를 기대하지 않게 된걸까. 모두가 영웅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고 다른 영웅이 나타나 오늘의 문제점들을 모두 깨끗이 정리해주길 기대하는 걸까. 세상은 축구판 같지 않다. 5:0으로 예선에서 탈탈 털리다 본선에서 4강 까지 가는 일은 문자 그대로 기적이다.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 그는 생전에 사람들을 달래 주었고, 그의 사후엔 사람들이 그를 달래주었다.

 

이명박의 집권 이후 몇 년간을 고민했던 문제가 오늘에서야 답이 나왔다. 다들 지쳐버린 것이다. 모두들 지쳐 신념이고 양심이고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냥 그럴듯해 보이는 쪽에 한 표를 던지고 골아픈 현실을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어 겁이 나기 시작했다. 삶에 찌들어 전환점을 찾을 힘마저도 잃어버리고는 쳇바퀴 돌리듯 살아가는 삶들이 모여 결국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을까 나는 너무나도 두렵다.

 

사람들이 이렇게 지쳐있지 않던 시절, 그래도 무어라도 기대를 해보던 시절의 한 전직 대통령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의 사후, 빈소를 찾은 한 시민의 인터뷰가 그의 5년을 짧지만 명확하게 설명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주세요."

 

다들 지쳐있는 이 시기에, 다음의 리더는 지칠대로 지쳐버린 사람들을 달래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경제를 살리지 않아도 좋고, 압도적으로 유능하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5년 단임제의 대통령 임기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니 사람들을 잘 달래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노무현이 그러했다. 그거 하나 말고는 기억나는 업적이 없는데도 나는 그가 많이 그립다. 그러니 다음의 리더는 제발 사람들을 보듬어주었으면 싶다. 나는 그거 하나면 만족할 수 있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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